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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l 믿음의 계대와 본향

noothername 2026. 5. 14. 10:35

 

장재형 목사

카라바조의 「성 마태의 소명」 앞에 서면, 빛보다 먼저 묻게 되는 것은 방향이다. 어둠을 가르며 들어온 빛은 가장 그럴듯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뜻밖의 자리를 향해 뻗는다. 왜 저 사람인가, 왜 저 순간인가. 복음은 언제나 인간이 세운 순서를 조용히 흔들며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의 사다리를 따라 내려오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길을 따라 사람을 부르신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설교가 히브리서 11장의 흐름 속에서 보여 주는 믿음도 그렇다. 믿음은 한 사람의 결단으로 닫히는 감정이 아니라, 받은 복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넘기며, 상처의 자리에서 사랑과 용서로 열매 맺고, 마침내 본향의 소망을 향해 걸어가는 삶이다. 그래서 이 성경 묵상은 단순한 인물 해설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무엇을 귀히 여기며 살고 있는지를 묻는 신학적 통찰이 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막연히 상상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아직 오지 않은 약속을 현재의 기준으로 삼는 일이다.

 

기억된 은혜가 시험을 견디게 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갑자기 솟아난 영웅심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자기 몸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은 자리에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 앞에서도 그는 끝장난 현실만 바라보지 않았다.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앞에 순종할 수 있었다.

 

여기서 믿음의 뿌리가 분명해진다. 믿음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기억된 은혜다. 하나님이 지나온 시간 속에서 어떻게 붙드셨는지를 잊지 않는 사람은, 현재의 시험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테스트는 인간을 파괴하려는 유혹이 아니라, 우리 안에 무엇이 실제로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거룩한 저울이다. 그래서 시험의 자리는 믿음의 부재를 폭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은혜의 기억이 얼마나 깊이 심겼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믿음은 이삭에게로 흘러간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보여 준 것이 드리는 믿음이었다면, 이삭에게서는 순종의 믿음이 보인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고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붙든 이삭의 믿음은 그 한순간의 장엄함만이 아니다.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한 삶, 곧 받은 은혜를 다음 세대에 넘겨준 삶이었다. 믿음은 내가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않고, 그 은혜가 역사로 이어지게 할 때 비로소 깊어진다.

 

이 대목에서 설교는 오늘의 가정과 공동체를 향해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신앙은 말로만 전해지지 않는다. 자녀는 부모의 설명보다 부모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귀히 여기는지를 먼저 배운다. 믿음의 계대란 신앙적 문장을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복의 무게를 삶으로 보여 주는 일이다.

 

팥죽 한 그릇 앞에서 흔들리는 영원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믿음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에서는 배고픔 앞에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 한 그릇 팥죽은 작아 보이지만,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는 현재의 허기가 장차 올 축복보다 커져 있었다. 믿음이 약해지는 자리는 대개 거대한 배교의 선언보다, 영원한 것을 순간의 필요와 바꾸는 작은 거래에서 먼저 드러난다.

 

반대로 믿음은 지금의 결핍보다 장차 있을 영광을 더 무겁게 여긴다. “장차 있을 일은 단순한 미래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성도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복음의 시선이다. 오늘의 부족함 때문에 영원한 것을 헐값에 넘기지 않는 마음, 그것이 믿음의 중요한 태도다. 순종은 때로 손해처럼 보이지만, 믿음의 사람에게 손해와 유익의 기준은 현재가 아니라 약속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믿음의 계대가 무너지는 지점을 날카롭게 짚는다. 복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고, 거룩을 잃은 선택 속에서 세상과 쉽게 섞일 때 믿음은 언약의 길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으로 축소된다. 부모가 자녀를 축복한다는 것은 좋은 말을 남기는 일이 아니다. 삶 전체로 하나님의 복이 얼마나 귀한지를 증언하는 일이다. 우리는 편안함을 물려주고 있는가, 아니면 믿음의 무게를 전하고 있는가.

 

사랑도 여기서 다시 해석된다. 사랑은 상대를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느슨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을 귀히 여기도록 붙드는 거룩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유산은 부드럽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은 눈앞의 만족을 넘어, 장차 있을 일을 바라보게 하는 마음의 훈련이다.

 

엇갈린 두 손 위에 내려온 하늘의 질서

야곱의 마지막 장면은 복음의 역전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만큼 쇠약한 몸으로도 마지막 축복의 자리에서 손을 엇갈려 얹는다. 오른손은 차자 에브라임에게, 왼손은 장자 므낫세에게 간다. 요셉은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야곱은 손을 바꾸지 않는다.

 

세상의 질서로 보면 어긋난 손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엇갈린 손이 오히려 진실을 말한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고, 먼저 된 자가 뒤로 물러서며, 자격보다 은총이 먼저 말하는 세계가 그 손 위에 놓여 있다. 은혜는 인간의 서열을 승인하는 힘이 아니라, 교만으로 기울어진 질서를 다시 세우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부르는 질서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같은 것은 아니다.

 

이 장면은 회개의 의미도 새롭게 비춘다. 회개는 단지 눈물을 흘리는 종교적 순간이 아니다. 내가 붙들던 서열과 계산과 당연함의 질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믿음은 내 자리를 지키려는 집착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내 계산과 다르게 움직일 때도 그것이 선하다고 고백하는 겸손이다. 그렇게 낮아질 때 사람은 비로소 복음이 여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야곱의 엇갈린 손은 늙은 몸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향을 증언하는 표지다. 작은 자를 앞세우시는 은혜, 늦게 온 자에게도 상을 베푸시는 사랑, 높아지려는 마음을 낮춤으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뜻이 그 손 위에 담겨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 앞에서 내 기준을 고집하지 않고,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데서 깊어진다.

 

눈물 끝에서 열리는 본향의 소망

요셉의 삶에 이르면 믿음의 결론은 화해와 용서로 깊어진다. 그는 채색옷 때문에 시기를 받았고, 웅덩이에 던져졌으며, 노예로 팔렸다. 그의 인생에는 억울함과 상처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의 악을 자기 생애의 마지막 문장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했다.

 

이 고백은 고통이 작았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셉의 눈물은 패배의 눈물이 아니라 원한을 넘어서는 사랑의 눈물이다. 복음은 과거를 지워 버리는 힘이 아니라, 과거를 하나님의 빛 안에서 다시 해석하게 하는 힘이다. 악조차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예정은 차가운 운명이 아니라 사랑의 섭리다.

 

여기서 용서는 망각이 아니라 믿음의 해석이 된다.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가볍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사실을 더 깊이 붙들었다. 그래서 그의 화해는 감정의 약함이 아니라 믿음의 강함에서 나온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결국 믿음의 마지막 방향을 본향의 소망에서 찾는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도 애굽에 마음을 묻지 않았다. 자기 뼈를 약속의 땅으로 메고 올라가 달라는 유언은, 신앙의 끝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조용히 증언한다. 소망은 현재의 안락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설교가 남기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나는 눈앞의 팥죽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장차 있을 일을 바라보며 믿음의 유산을 준비하고 있는가. 나는 상처를 더 크게 기억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은혜의 손길을 더 깊이 기억하는 사람인가. 믿음은 받은 복을 소유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복을 계승하고, 사랑으로 화해하며, 용서로 완성하고, 끝내 본향을 바라보는 삶으로 이어진다. 그 길 위에 선 사람만이 자기 생애를 넘어 다음 세대까지 흘러가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이 물음은 오늘의 신앙을 오래 붙든다. 우리는 자주 믿음을 위기에서 건져 달라는 도구로만 이해하지만, 성경은 믿음을 다음 세대를 세우고 원수를 형제로 맞이하며 낯선 본향을 향해 길을 떠나는 힘으로 증언한다. 그러므로 참된 순종은 좁은 순간을 넘어 긴 약속의 시간 속에서 자신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결국 믿음의 길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데서 시작해, 현재의 순종을 지나, 미래의 소망을 향해 열리는 하나의 긴 순례다. 

 

 

 

 

www.davidjang.org 

 

 

장재형 박사는 현장 선교와 디지털 미디어 사역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해 왔으며, 그 사역의 열매로 지상명령에 헌신하는 많은 이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을 바탕으로 올리벳은 처음에 선교사 훈련을 위한 작은 교회 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과 선교 인재 양성을 위해 2000년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 올리벳신학대학 및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장 박사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에 Olivet University를 공식 설립했다. 올리벳은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신학을 중심으로 음악, 저널리즘, 예술디자인, 기술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윌리엄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교수진을 영입하며 교육 역량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옛 UC 버클리 다운타운 익스텐션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2006년 장 박사는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총장직을 데이비드 제임스 랜돌프 박사에게 이양하고, 국제총장으로서 세계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이후 Olivet University 2009년 기관 인증을 받았으며, 언어교육대학과 경영대학을 추가하고 학위 과정과 국제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장재형 박사는 현장 선교와 디지털 미디어 사역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해 왔으며, 그 사역의 열매로 지상명령에 헌신하는 많은 이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을 바탕으로 올리벳은 처음에 선교사 훈련을 위한 작은 교회 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과 선교 인재 양성을 위해 2000년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 올리벳신학대학 및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장 박사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에 Olivet University를 공식 설립했다. 올리벳은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신학을 중심으로 음악, 저널리즘, 예술디자인, 기술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윌리엄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교수진을 영입하며 교육 역량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옛 UC 버클리 다운타운 익스텐션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2006년 장 박사는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총장직을 데이비드 제임스 랜돌프 박사에게 이양하고, 국제총장으로서 세계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이후 Olivet University 2009년 기관 인증을 받았으며, 언어교육대학과 경영대학을 추가하고 학위 과정과 국제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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